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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나눔

삼월에 추는 눈의 왈츠 中 추석 _ 정명희 추석 전날 부지런히 준비했다. 물가가 얼마나 올랐던지 풍요로운 추석보다 시장보기가 겁났다.음식을 혼자 하다 보니 추석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부담스럽고 번잡스러운 것이 싫었다. 추석 전날 시댁에서 송편을 빚고, 전을 부치는 시간이 하루종일 힘들었다. 결혼하고 그해 처음 한복을 입어본 뒤 일하느라 비싼 한복은그 뒤로 농지기가 되었다.그러던 것이 차츰 세월이 흘러 시어머님이 하시던 일을 내가 전수받게 되었다. 시댁에서차례를 지낼 때는 그나마 명절 분위기가 있었다. 그러다 집에서 음식을 장만하여 그곳에가지고 가 지내며 왔다갔다 할 때는 귀찮아도 그런대로 재미가 있었던 추석이었다. 시동생이 집을 판 뒤로 고향이 없어진 것 같아 씁쓸하다. 내 마음이 이러니 남편은 오죽했을까. 힘들어도 좋았던 고향이 사라.. 더보기
`바람자루 속에서` 중에서_김도연 길을 막은 채 태연히 서 있는 짐승은 처음이었다. 졸음을 쫓아준 데 대한 답례로 그는 짧고 가볍게 경적을 울렸다. 고라니의 귀가 쫑긋 올라갔지만 여전히 비켜서지는 않았다. 다시 경적을 울리고 차를 조금씩 앞으로 이동시켰다. 그제야 고라니는 굳어버린 듯한 몸을 풀고 돌아서더니 산이 아닌 다리 위로 겅중겅중 뛰어갔다. 다리를 무사히 건넌 그는 갓길에 차를 세웠다. 고라니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검은 소나무숲 입구에 서 있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오른편 유리창을 내렸다. 다리의 마지막 가로등 빛을 뒤집어쓰고 있는 고라니의 표정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차분했다. 잘 가. 다음부턴 절대 고속도로로 들어오지 말고. 여긴 굉장히 위험해. 하지만 고라니는 아무 말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더보기
간과 쓸개_김숨 김숨, 「간과 쓸개」 중에서 저녁에는 ‘남원추어탕’이라는 식당에서 친구 김과 한, 그리고 정과 저녁 식사 겸 모임을 가졌다. 추어탕과 미꾸라지 튀김 한 접시, 소주를 주문했다. 미꾸라지 튀김이 나오기 전까지는 별 의미 없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수북하게 쌓인 미꾸라지 튀김은 고소한 냄새를 풍겼다. 바삭바삭해 보이는 게 오랜만에 입맛이 동했다. 미꾸라지 튀김을 한 개 집어서 베어 먹었다. 기름을 잔뜩 머금은 미꾸라지의 살과 뼈가 고소하게 씹혔다. 나는 소주를 한 잔 받아놓고 아껴가며 마셨다. 간암 환자 신세가 된 뒤로는 소주를 한 잔 이상 마신 적이 없었다. 미꾸라지 튀김을 대여섯 개 집어 먹었더니 배가 더부룩하게 불러왔다. 사이다 한 병을 시켜, 술을 한 잔도 못하는 정과 나누어 마셨다. 화장실에 가기 .. 더보기
논두렁_이덕규 찰방찰방 물을 넣고 간들간들 어린모를 넣고 바글바글 올챙이 우렁이 소금쟁이 물거미 미꾸라지 풀뱀을 넣고 온갖 잡초를 넣고 푸드덕, 물닭이며 논병아리며 뜸부기 알을 넣고 햇빛과 바람도 열댓 마씩 너울너울 끊어 넣고 무뚝뚝이 아버지를 넣고 올망졸망 온 동네 어른 아이 모다 복닥복닥 밀어 넣고 첨벙첨벙 휘휘 저어서 마시면, 맨땅에 절하듯 누대에 걸쳐 넙죽넙죽 무릎 꿇고 낮게 엎드린 생각들 길게 이어 붙인 저 순하게 굽은 등짝에 걸터앉아 미끈유월, 그 물텀벙이 한 대접씩 후르륵 뚝딱 들이켜면 허옇게 부르튼 맨발들 갈퀴손가락들 건더기째 꿀떡꿀떡 넘어가겠다 ◆ 시_ 이덕규 - 1961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으며, 1998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밥그.. 더보기
`그 다락방에만 있다네, 안식을 주는 그 커피는` 중에서 _ 양선희 성장기에 외국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다락방을 터전 삼아 뭔가를 이루는 주인공들을 많이 봤다. 그때마다 나는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꿈을 꿀 수 있는 그런 공간을 갖고 싶어 안달했었다. 내가 살던 옛집에는 벽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대전에서 집 짓는 일을 하는 청년 박창수 얘기를 들으니 요즘은 4~5층 건물을 신축할 때 옥탑방 대신 다락방을 짓는다고 한다. 지붕 밑의 그 방은 햇빛이 들어오는 모양이 좋고, 서 있을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어 인기를 끈다고 한다. 사람들이 다락방을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층보다 분양 가격대가 조금 싸다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지상에서는 적당히 떨어져 있고, 하늘과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바로 다락방이다. 그곳은 필요한 만큼 비현실.. 더보기
참 좋은 말_천양희 내 몸에서 가장 강한 것은 혀 한잎의 혀로 참, 좋은 말을 쓴다 미소를 한 육백개나 가지고 싶다는 말 네가 웃는 것으로 세상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 오늘 죽을 사람처럼 사랑하라는 말 내 마음에서 가장 강한 것은 슬픔 한줄기의 슬픔으로 참, 좋은 말의 힘이 된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는 말 물방울 작지만 큰 그릇 채운다는 말 짧은 노래는 후렴이 없다는 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말 한송이의 말로 참, 좋은 말을 꽃피운다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란 말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말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온다는 말 ◆ 시_ 천양희 - 1942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1965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더보기
조깅_황인숙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후, 후, 후! 하, 하, 하, 하! 후, 하! 후, 하! 후하! 후하! 후하! 후하! 땅바닥이 뛴다, 나무가 뛴다. 햇빛이 뛴다, 버스가 뛴다, 바람이 뛴다. 창문이 뛴다. 비둘기가 뛴다. 머리가 뛴다. 잎 진 나뭇가지 사이 하늘의 환한 맨몸이 뛴다. 허파가 뛴다. 하, 후! 하, 후! 하후! 하후! 하후! 하후! 뒤꿈치가 들린 것들아! 밤새 새로 반죽된 공기가 뛴다. 내 생의 드문 아침이 뛴다. 독수리 한 마리를 삼킨 것 같다. ◆ 시·낭송_ 황인숙 - 195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8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슬픔이 나를 깨운다』, 『우리는 철새처.. 더보기
`약속해줘, 구름아`_박정대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신다, 담배를 피운다, 삶이라는 직업 커피나무가 자라고 담배 연기가 퍼지고 수염이 자란다, 흘러가는 구름 나는 그대의 숨결을 채집해 공책 갈피에 넣어둔다, 삶이라는 직업 이렇게 피가 순해진 날이면 바르셀로나로 가고 싶어, 바르셀로나의 공기 속에는 소량의 헤로인이 포함되어 있다는데, 그걸 마시면 나는 7분 6초의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삶이라는 직업 약속해줘 부주키 연주자여, 내가 지중해의 푸른 물결로 출렁일 때까지, 약속해줘 레베티카 가수여, 내가 커피를 마시고 담배 한 대를 맛있게 피우고 한 장의 구름으로 저 허공에 가볍게 흐를 때까지는 내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내가 어떡하든 삶이라는 작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내 삶의 유리창을 떼어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구름아, 그대 심장에서.. 더보기